지난 1월부터 오는 7월까지 계속되는 탐사는 한―몽골 합동조사단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조사단에는 몽골측에서 과학아카데미 오치르 역사연구소장과 몽골한국학회 체빈도르지 회장 등이, 한국측에서 김호동(김호동·서울대 부교수·동양사학) 류원수(유원수·한국외국어대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몽골학) 이개석(이개석·경북대 부교수·동양사학) 최한우(최한우·호서대 조교수·해외개발학) 김지인(김지인·서울대 대학원생·고고미술사학)씨 등 젊은 연구가와 취재기자들이 참가했다.>>
세계적인 시사주간 「타임」지는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했다.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예수나 석가모니도 칭기즈칸에게는 밀렸다.
칭기즈칸 이후 몽골은 그때까지 초원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조그만 부족의 이름에서 대제국의 건설자로 인류사에 굵은 획을 긋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변화된 것은 몽골 자신만이 아니었다. 인류역사도 더이상 과거와 같은 것일 수 없었다. 유럽은 유럽대로, 중동은 중동대로, 동아시아는 동아시아대로 새로운 시대 즉 하나의 정치경제적 헤게모니 아래에 통합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시대를 맞이했다.
칭기즈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많은 도시와 문명을 파괴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좁은 지역세계의 울타리를 허물었고 다른 세계에 대한 무지와 미망도 날려버렸다. 이 시대에 중국을 다녀간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유럽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킨 사실은 유럽이 그동안 외부세계로부터 얼마나 차단돼 있었으며 그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목말라했는지를 입증한다.
또한 이란의 몽골궁정에서 재상을 지낸 라시드 웃 딘이 저술한 「집사」(集史)라는 책은 유라시아의 거의 모든 민족들의 역사를 망라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최초의 세계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제국의 탄생은 세계사의 새로운 탄생이었고 출발이었다.
몽골인은 자기들이 「탱그리(하늘)의 명령을 받고 태어난」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후예라고 생각했고 칭기즈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이 탱그리의 축복을 받아 세계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리라고 믿었다. 그들이 외국의 군주에게 투항할 것을 요구하며 편지를 보낼 때도 항상 탱그리의 명령을 근거로 삼았다. 그 좋은 예가 고려에 보낸 서한이다.
이 글은 「天底氣力 天道將來底言語 所得不秋底人 有眼할了 有手沒了 有脚子了」로 시작하는데 이제까지는 정확한 의미를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수년전에 타계한 몽골어의 대가 클리브스 교수는 이 문구를 다음과 같이 교정하고 뜻을 해석했다. 「天底氣力裏 道將來底言語 所得不投底人 有眼할了 有手沒了 有脚子了」, 즉 「하늘의 힘에 (기대어) 내가 하는 말. (우리는)투항하지 않는 사람을 잡아 눈이 있는 자라면 멀게했고 손이 있는 자라면 없앴으며 다리가 있는 자라면 분질러 버렸다」.
무시무시한 내용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지구 끝까지 정복하고 말겠다는 그들의 의지, 저항하는 어떠한 적도 용서치 않겠다는 그들의 결의를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세계사에서 풀기 힘든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몽골초원에 흩어져서로 죽기 살기로 전쟁만하던 유목민들을 그가 통일한 것은 1206년. 이때 그의 휘하에 들어온 몽골 유목전사들의 숫자는 모두 합해도 10만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소수의 몽골군은 그보다 수백배가 넘는 중국을 정복했다. 그들의 말발굽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알타이 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을 완전한 페허로 만들었고 러시아와 유럽의 기사단들도 그들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들은 난생처음 밟는 땅에서 전쟁을 했지만 군대의 배치 진격 귀환은 모두 시계바늘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됐다. 상세한 작전지도가 있을리 만무했던 그 당시에 이러한 정보는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
더구나 칭기즈칸이 시작한 몽골의 세계정복전은 그의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손자에 이를 때까지 계속돼 동유럽에서 만주까지, 시베리아에서 인더스강까지, 사실상 인도와 서유럽을 제외한 유라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것은 역사가 일찍이 보지못했던 거대한 제국의 탄생이었다. 이 제국은 14세기 중반 이곳 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금이 가기 시작할 때까지 위엄을 지켰고 러시아 같은 나라는 16세기 들어서야 겨우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몽골제국을 이처럼 지속케 했던 그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손쉬운 해답은 없다. 만약 그러한 해답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몽골제국에 대해 쓰여진 수많은 책과 학자들의 땀은 얼마나 무익한 것이었겠는가.
그 해답이 어디에 있든, 일단은 칭기즈칸 출현 당시 몽골초원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그는 거기서 어떻게 지도자의 자질을 연마했는가, 몽골기마군대의 위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들과 맞서 싸웠던 다른 나라들은 어떠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에 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의문은 책상머리의 상상과 추측만으로는 풀릴 수 없다. 춥고 황막한 몽골초원을 직접 보고, 몽골사람들의 순박하고 강인한 체취를 느끼며, 그들이 말을 달려 정복했던 지역들을 하나하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런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이 가져온 「세계사의 새로운 탄생」이 던져주는 수수께끼를 풀어볼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고비남쪽 중국령 내몽고(內蒙古)는 1636년 청(淸)에 먼저 복속되면서 1691년에 복속된 고비북쪽 몽골인들에 대한 상대적 법적 개념으로 내몽고로 분류되다가 곡절을 거쳐 1947년 5월1일부터 중국 내몽고자치구가 됐다. 몽골인들은 청조와 중국의 관점에서 보는 내 외몽고라는 말 대신 각각 우브르 몽골(남몽골)아르 몽골(북몽골)이라는 말을 쓰며 아르 몽골은 할하 몽골(할하 연맹 몽골)이라는 말과 혼용되기도 한다.
내몽고자치구에는 몽골국 전체 인구보다 더 많은 3백만 몽골인이 있다. 19세기초까지만 해도 근소한 차이로나마 몽골인이 내몽고 최대민족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1천8백만명이나 돼버린 한족들 속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간다.
몽골국 북쪽 바이칼호 주변에 사는 40만 몽골인을 부리야트 몽골이라 부른다. 이곳은 1727년 청국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캬흐타 협정에 따라 러시아령이 됐고 주민들은 이제 러시아 연방내 부리야트공화국 공민으로서 자기네보다 3배는 많을 러시아인들과 섞여 산다. 부리야트 몽골인의 87% 가량은 몽골어를 사용한다.
몽골국은 전에 우리가 외몽고 또는 몽골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칭기즈칸이 태어난 헨티아이막도 이 몽골국의 18개 아이막 가운데 하나다.
몽골은 춥고 건조하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연평균 기온이 서울보다 15도 가량 낮은 영하 2.9도, 1월 평균기온이 영하 26.1도, 7월 평균기온도 17도다. 연중 강수량도 서울보다 1천㎜이상 적은 2백33㎜에 불과하다. 국토의 평균 해발고도가 1,580m나 되는 높은 곳이다. 강력한 고기압대의 중심지역이며 강수량이 증발량의 몇분의 1에 불과하다.
4월은 사람에게나 가축에게나 연중 가장 힘든 때다. 한낮의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세찬 흙바람이 불어 겨우내 추위에 시달린 사람과 가축, 특히 갓 태어난 새끼와 막 새끼를 낳은 어미를 5월까지 괴롭힌다. 그러나 6월부터 8월까지는 싱싱한 풀을 먹은 가축들이 힘을 차려 어미의 젖이 사람을 먹여 살릴 만큼 풍부해지고 사람들도 늠름한 모습을 되찾는다. 그리고 10월부터는 몹시 춥고 긴 겨울이 시작된다.
이 지역 사람들은 6천년전인 신석기 중기 시대부터 짐승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4천∼3천년전인 청동기∼철기 초기시대에는 계절의 변화와 물, 풀의 형편에 따라 가족과 함께 양 염소 소 말 낙타 같은 가축을 수십에서 수백마리씩 끌고 한번에 몇㎞에서 몇십㎞씩, 1년에도 몇차례에서 몇십차례씩 옮겨다니는 유목이 기간산업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산업이 다양해지는 지금도 몽골국 경제활동인구의 절반 가까운 40만 유목민이 3천만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기른다. 95년의 경우 국민들은 유목의 산물인 가축의 젖과 고기를 1인당 각각 1백25.5㎏과 96.7㎏씩 소비했고 곡식과 채소 감자는 모두 합쳐 1백13.5㎏씩을 먹었을 뿐이다.
남북한 면적의 7배를 넘는 넓은 몽골국에는 2백40만명 남짓한 사람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2백20만명 가량이 몽골인이다. 몽골의 인구가 이렇게 적은 것은 첫째로 「흉노 순유시대부터 내 조상들의 고향, 내가 태어난 몽골의 아름다운 땅」이라고 노래한 몽골의 윤동주, 나착도르지(1906∼1937)처럼 몽골인들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랑하는 몽골의 기후 토양 지형 생태가 곡식과 채소 농사 뿐만 아니라 사람이 늘어 나는데도 적당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흉노 돌궐 위구르 패망후 이 사람들의 주력이 몽골을 빠져 나갔고 7백∼8백년전 칭기즈칸의 아들들 손자들 대에 많은 몽골인이 원정군으로 점령군으로 유라시아 각지로 퍼져 나갔다가 그 고장 사람이 돼버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몽골인들은 인구의 증가가 나라발전과 민족번영의 필수요건이라고 믿는다. 그런 몽골인들에게는 「몽골링 우르스 맛시 올롱 볼토가이」(몽골의 후손들이 아주 많아지기를)라는 국민적 염원이 있다.
평균적 몽골인은 강한 해와 거칠것 없는 바람에 피부색이 더 진해진 것 말고는 체격과 외모가 우리와 비슷하고 엉덩이에 푸른 반점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다.
오늘날 몽골인의 주된 걱정거리는 오르는 물가, 늘어나는 범죄, 그리고 자녀교육문제다. 평균적 몽골인은 티베트 겔룩 바파(속칭 노랑 모자파)불교의 교리와 몽골의 토속신앙이 통합된 몽골불교의 그다지 열렬하지 않은 신도다.
신강성에서 일어난 폭동의 여파를 피해 1864년부터 알타이산맥을 넘어온 카자흐 사람들은 몽골이 청조의 지배에서 벗어남에 따라 1917년 3월23일 정규 몽골국민이 됐다.
외모와 체격은 몽골인과 차이가 없으나 투르크계 언어인 카자흐어를 사용한다. 대개 순니 이슬람교도들이며 남자들은 몽골인들이 그저 카자흐 모자라고만 하는 차양없는 모자를 쓰고 다닌다. 15만 남짓한 몽골의 카자흐인들은 소수민족으로서 유형무형의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통일로 약탈과 살육과 보복의 악순환이 몽골고원에서 종지부를 찍었고 몽골은 몽골인들의 땅으로 영구확정됐다. 오논강 상류일대에서 유목하던 일개 부족의 이름 몽골은 그가 통일한 고원의 주민 모두와 그 주민들이 1206년 대칸으로 추대한 칭기즈칸이 함께 세운 위대한 나라의 이름이 됐다.
원(元)패망후 몽골 고원으로 돌아와서도 그들은 칭기즈칸의 직계후손만을 대칸으로 인정했다. 청(淸)에 복속돼 있을 때나 1920년대 이후 70년간 몽골국의 모든 것이 소련의 간섭을 받던 질곡의 시절, 1910년대 독립운동기나 1990년대 민주화운동기 같은 격변기에는 항상 칭기즈칸이 몽골인과 함께하며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었다. 소련 영향권내의 모든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추잡한 범죄 취급을 받던 불행한 시대에도 칭기즈칸은 변함없이 몽골민족의 최고영웅이었다.
1962년 봄 몽골 티베트 중국 사료를 두루 상고한 역사학자들과 몽골불교의 중심 간단 테그친링(완벽한 기쁨)사 별자리 연구가들이 칭기즈칸의 탄생을 1162년5월31일 오전 6시경으로 추정했다. 이에 따라 탄신 8백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됐다. 5월31일에는 탄생지로 알려진 델리운 볼닥에서 남으로 3㎞ 떨어진 몽골국 헨티아이막 다달솜(아이막, 솜은 우리의 도 군에 상당) 고르반 노르휴양소에서 12m 높이의 기념비가 제막됐다. 기념비 앞면에는 칭기즈칸의 초상과 몽골인들의 술드(수호 영령의 표상) 그리고 「한길 내 몸이 잘못되면 되었지 내 나라가 잘못될 수는 없다」는 그의 유언이, 뒷면에는 「몽골을 건국한 칭기즈칸의 탄신 8백주년을 기념한다」는 글이 새겨졌다.
이같은 모든 일은 몽골인민혁명당 정치국원이며 당중앙위원회 서기인 투무르오치르가 총괄했고 이는 1962년2월 당 정치국에서 결정된 일이었다. 칭기즈칸 사당이 있는 중국 내몽고 오르도스의 에젠호로(주군의 뜰)에서도 탄생 8백주년 기념행사가 중국공산당 내몽고자치구 제1서기 올란후 주재로 대대적으로 거행됐다.
그러나 당시 몽골인민공화국(1924∼1992년)은 몽골인민혁명당이 독재하고 있었고 그 당은 소련공산당이 조종했기 때문에 칭기즈칸 추모행사로 인해 몽골인들은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1962년9월8일 당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투무르오치르는 개인숭배자 민족주의자 반당행위자로 비판받고 수도 울란바토르 거주가 금지됐다. 기념우표도 회수됐다. 같은해 11월1일자 소련 프라우다지는 그의 죄상을 낱낱이 공개했다고 한다.
1963년7월에는 그의 당원자격이 박탈됐다. 당에서 지정한 고장을 떠돌며 살던 투무르오치르는 병든 몸을 치료받기 위해 울란바토르 이주허가를 청원했으나 1985년 집에서 혼자 의문의 죽음을 당할 때까지도 허가는 나오지 않았다. 몽골에서는 바트문흐가 대통령이 돼 있었고 소련에서는 1984년 몽골의 최고실력자 체덴발을 실각시키고 대신 바트문흐를 내세우는 일을 직접 지휘한 고르바초프가 실력자가 돼있는 때였는데도.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의 동요와 함께 몽골에서도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 몽골인민혁명당의 일당독재를 거부하고 소련의 정치 경제 문화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열에 칭기즈칸의 대형초상화가 등장했다. 칭기즈칸이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으로 등장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90년은 마침 칭기즈칸과 그 시대에 대한 기록으로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상세하고 가장 오래된 「몽골비사」를 쓴지 7백50년이 되는 해였다. 책을 쓴 곳으로 추정되는 헨티아이막 델게르한솜 아라샨 옥하라는 벌판 가운데 칭기즈칸의 초상과 칭기즈칸의 대몽골국 건국에 참여한 각 씨족의 문장(낙인), 「몽골비사」의 마지막 구절을 새긴 높이 5.2m, 한면의 폭이 각 70㎝인 사면비를 지름 12㎝인 둥근 돌 바탕 위에 세웠다. 그리고 오치르바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씨름 말달리기 활쏘기로 구성되는 나아담(축제)이 대대적으로 거행됐다.
투무르오치르의 수난이래 30년 동안 몽골인들이 감추어 두었던 칭기즈칸에 대한 존경과 몽골인이라는 자부가 글로 말로 노래로 쏟아져 나왔다. 특히 자르갈사이항의 「칭기즈칸」 「칭기즈의 영웅들」이라는 노래는 몽골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대 이름을 말하기가 두려웠습니다/그대 모습을 그려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당신의 죄와 덕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당신에 대한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조국 몽골을 위하여라고 한 대칸의 잘못입니까/조국의 역사를 위하여라고 한 당신과 우리의 잘못입니까…」(자르갈사이항의 「칭기즈칸」).
새로 나오는 지폐마다 칭기즈칸의 초상이 사용됐다. 몽골에서 생산되는 가장 좋은 술도, 외국과 합작으로 세운 최고급 호텔도 칭기즈칸이라 이름지었다.
1996년2월2일 오치르바트 대통령은 이날을 몽골국 수립 7백90년이 되는 날로 선포했다. 특별사면도 있었다. 몽골국의 역사는 1921년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모든 몽골인들이 칭기즈칸과 함께 국가를 건설한 1206년부터 시작됐다는 천명이었다.
「아아, 나의 몽골의 운명/불속에 빠져버린 경이의 운명/물에 타버린 진리의 운명/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나의 너의 우리모두의 몽골의 운명…」(자르갈사이항의 「칭기즈의 영웅들」).
칭기즈칸의 탄생지 델리운 볼닥은 광활한 초원으로 뻗은 자동차길만 따라가면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6백㎞가 채 안된다.
울란바토르에서 동남쪽으로 2백30㎞쯤 달려 투브아이막(아이막은 우리의 도)을 막 벗어나면 아득한 옛날부터 몽골땅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거의 다 목격한 헤를렝강(1,090㎞)이 나온다. 그 강을 건너면 헨티아이막 쳉케르만달솜(솜은 우리의 군) 오스틴 덴지다.
칭기즈칸의 고향 헨티아이막은 크고 작은 나아담(축제)에서 우승하는 명마들로 이름난 고장이다. 몽골의 말달리기 시합은 트랙을 따라 1∼2㎞를 뛰는 정착국가의 경마와는 달리 초원길 10∼25㎞를 달려 승부를 가린다. 출전마들은 두살 미만, 세살 미만, 네살 미만, 다섯살 미만, 여섯살 이상, 종마로 분류된다. 96년7월11∼12일 몽골 수립 7백90주년과 인민혁명 75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나아담에서 11.25㎞를 뛴 1∼2살배기 4백마리 가운데서는 헨티아이막 쳉케르만달솜의 도가르 수렝의 회색 망아지가 우승했다. 24.6㎞를 뛴 종마 6백30마리 가운데서도 울란바토르 사업가 바트후가 헨티아이막 바얀호탁솜 담단잡에게서 사들인 옅은 갈색말이 33분28초만에 반환점을 돌아와 우승했다.
몽골의 말은 사람으로 치면 마라톤선수 겸 역도선수다. 이렇게 힘세고 참을성 있는 몽골말이 있었기에 칭기즈칸의 세계제국 창업도 가능했을 것이다.
몽골에는 직업기수가 따로 없기 때문에 말달리기 대회의 선수는 대개 10세 전후의 아이들이다. 말은 기수가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쳐 달리며 반환점을 돌고나면 숨이차서 죽기도 한다. 죽은 말의 어린 기수가 애통해 하는 모습은 마치 동생을 잃고 슬퍼하는 어린 누나처럼 애처롭다.
예로부터 헨티아이막은 유명한 장사 역사들이 배출되는 고장이다. 96년 전국 나아담의 씨름에서 우승한 바트에르덴도 헨티아이막 사람이다. 전국 나아담에서 씨름은 5백12명의 장사가 출전, 토너먼트 방식으로 단판 승부로 겨룬다. 그래서 2백56명→1백28명→64명→32명 하는 식으로 사람이 줄다가 맨 마지막에 2명이 남아 승부를 가리며 여기서 이기면 전국최고 장사로서 고향 박물관에는 늠름한 모습의 전신그림이 영구전시된다.
몽골 씨름꾼들도 체격이 크고 힘이 세지만 배는 거의 나오지 않아 8백여년전 칭기즈칸의 용사들이 저랬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런 체격은 경기방식과 관련있는 것 같다.
몽골 씨름은 샅바없이 서로 떨어진 상태에서 시작되며 체급도 없다. 경기장이 큰 것은 축구장만해 금 밖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며 승부와도 관계가 없다. 힘이 셀 뿐 아니라 몸놀림도 빨라야 상대방에게 공격기술을 걸어볼 수 있다. 96년 나아담에서 결승전은 4시간이 지나서야 승부가 났다. 칭기즈칸의 세계제국 창업은 이렇게 참을성 많은 몽골의 용사들과 함께 이루어 낸 것이었다.
칭기즈칸의 아우 카사르와 카사르의 아들 이숭게는 모두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숭게는 1225년 보카 소치카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시합에서 5백36m를 쏘아 우승했다고 하니 그때는 멀리쏘기로 겨루었던 듯하다. 당시 몽골 병사가 휴대했던 평균적인 활도 70㎏정도의 힘으로 끌어당겨 화살이 1백80m를 날아가도록 제작됐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몽골병들의 활과 화살은 적 병사 개개인을 명중시키는 것보다는 소부대 기동을 제압하는데 주안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요즈음 나아담에서는 여자부는 56m, 남자부는 72m거리의 과녁을 한번에 4발씩 9회를 쏘아 쓰러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겨룬다. 96년 전국 나아담에서 남자부 우승자는 34발을, 여자부 우승자는 32발을, 며칠뒤 국회의장이 된 곤칙도르지 의원은 4발을 쏘아 3발, 오치르바트 당시대통령도 한발을 명중시켰다.
테무친이 태어난 델리운 볼닥이라고 주장되는 곳은 대략 예닐곱이나 된다. 그러나 헨티아이막 운드르항에서 북으로 2백60㎞를 달려 다달솜에 이르고 다시 북으로 5㎞쯤 더 가면 오농강과 발지강 사이에 자리한 소의 지라 모양을 한 야트막한 소나무 동산에 다다른다. 그 곳이 절대다수의 전공학자들과 몽골인들이 칭기즈칸의 탄생지로 지목하는 「몽골비사」의 델리운 볼닥이다.
다만 몽골과학아카데미와 일본 요미우리신문사가 장기간의 현지조사 끝에 94년 일본에서 낸 공동보고서에는 빈데르솜 소재지에서 멀지 않은 람이잉 옥하(동경110도38분, 북위48도35분)가 델리운 볼닥으로 올라 있다.
오랜 서하(西夏)원정을 마치고 귀환에 오른 칭기즈칸은 1227년 음력7월12일 오늘의 중국땅 감숙성(甘肅省) 청수현(淸水縣)의 육반산(六盤山)에서 66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 무덤의 소재지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헨티아이막 어디쯤이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다.
유원수 (한국외국어대 연구원)
▼ 몽골스님과 결혼한 한국여성 김선정씨 ▼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 간단사(寺). 몽골 불교(라마교)의 최대사원인 이곳에 몽골스님과 결혼한 한국인 여자가 산다.
간단사 승가대 미술과장 푸루밧 스님(34)의 부인 金宣靜(김선정·36)씨. 김씨도 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김씨는 지난 89년 불교미술의 원류인 밀교미술을 배우기 위해 티베트로 갔다. 그후 달라이라마가 망명해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푸루밧 스님을 만났고 94년에 몽골로 함께 이주, 간단사 승가대에 미술대를 설립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앙크하나(4)도 태어났다.
『몽골문화는 불교문화입니다. 티베트미술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고 아름다우며 특히 자나바자르의 작품들은 그리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어떤 작품들보다 인체를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간단사 미술대 불교문화원에는 이들 부부와 45명의 학승들이 만든 대형 입체만다라를 비롯, 가축에 찍는 낙인(탐가) 등 전통문양을 복원한 작품들이 빼곡이 쌓여 있다. 이들은 이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교과서(18권)로 편찬하고 티베트어로 돼 있는 미술관련 경전 56권을 현대 몽골어로 번역할 계획이다
중국여정에서 만리장성을 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게다. 칭기즈칸의 몽골군대가 처음 이곳을 들이쳤을 때 오늘날과 같은 장성의 모습은 없었다. 거용관(居庸關)이 몽골군의 진입을 저지했다.
팔달령(八達嶺)에 이르기 전에 차도 왼편에서 관객을 맞는 아치형 동문(洞門)을 볼 수 있다. 위로 탑(과가탑·過街塔·일명 운대·雲臺)을 받치고 아래로 사람이 통행했던 이 동문은 원(元)대에 지은 것이다.
1211년2월 칭기즈칸은 높은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고 영원한 하늘(長生天)의 권능으로 금(金)나라에 대한 원한을 갚도록 도와줄 것을 빌었다. 고려인의 후예 아구타가 세운 여진족의 나라 금(1115∼1234)은 그동안 정기적으로 군대를 보내 몽골족의 장정을 제거(減丁)해왔고 칭기즈칸의 선조 암바가이 칸을 나무 노새에 못박아 처형했다. 금은 칭기즈칸까지도 붙잡아 죽이려 했다. 금을 도와 타타르부를 격파한 공로로 조공무역권을 획득한 칭기즈칸이 1208년 새로 즉위한 황제의 조서를 받으러 정주(淨州)에 갔을 때 공물(貢物)을 접수하던 위소왕(衛紹王)이 새 황제로 즉위한 것을 알고 『이 따위 용렬하고 나약한 자도 황제가 된단 말인가. 어찌 그로부터 조(詔)를 받겠는가』라며 북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칭기즈칸의 금 정벌은 묵은 원한도 개재돼 있었지만 신흥 몽골국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금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몽골초원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또 서방의 강적인 호레즘 샤와 싸워 초원의 패자가 되려면 먼저 금을 굴복시켜 후고(後顧)의여지를없애야했다.
케룰렌 하반에는 1만명의 케식(겁설)군과 탐마치(탐마적)군 외에도 몽골부족군 12만명이 모였다. 칭기즈칸은 4만명의 우익군을 주치 차가타이 워게데이에게 주어 토르강에서 옹구트부 지역으로 남하하게 하고, 7만명은 다시 중군과 좌익으로 나누어 자신은 무카리와 함께 중군을 이끌고 제베 수부데이 주치카사르와 막내아들 툴루이에게 맡긴 좌익과 함께 케룰렌 강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갔다.
당시 금의 정규군 맹안모극군(猛安謀克軍)은 27만명이고 이민족으로 이뤄진 규 군과 지방군인 화모군이 따로 있었지만 몽골을 얕본 새 황제는 주력을 남송과의 경계에 배치하고 있었다. 반면 칭기즈칸은 음산산맥 대청산(大靑山)북방의 몽골부족 옹구트부를 통일 전부터 끌어들였고 난하 상류에 근거를 가진 거란호족 야율아해 독화 형제도 오래 전부터 칭기즈칸의 막하에 투신해 금나라 북방을 지키는 거란족 장군과 이미 기맥이 닿아 있었다.
동생 오지킨에게 뒤를 부탁하고 먼저 난하 상류에 도착한 칭기즈칸은 옹구트 부장 아랄쿠시(阿刺忽失)의 향도로 대청산을 넘은 우익군을 기다려 공격을 시작했다. 야율아해가 선도한 우익군은 서경(西京·다퉁·大同)방면으로 공격하고, 야율독화가 안내한 좌익군은 네이멍구(內蒙古) 고원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요충 야호령(野狐嶺)을 향해 진격했다. 뒤늦게 급보를 받은 금의 주력은 야호령근처 오사보(烏沙堡)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제베가 이끈 몽골 좌익군이 우회해 이를 격파했다. 금군을 추격해 야호령을 내려간 제베의 군대는 거용관을 지키는 수비군을 유인해 격파했고 단숨에 수도인 중도(中都)까지 진격해 포위했다.
그러나 중도성의 방어는 견고했고 구원군이 왔기 때문에 제베군은 일단 장성 이북으로 물러갔다. 그래도 몽골군의 1차 공격은 큰 소득이 있었다. 거란족 군단이 전투다운 전투 없이 몽골에 투항했고 우익군도 네이멍구 자치구 수도 후허호트 서쪽의 초원(운내주·雲內州)에서 40만(일설 1백만)마리의 군목감(軍牧監) 군마를 빼앗아 금군의 기동력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힌 의외의 전과를 올린 것이다.
네이멍구 초원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212년제2차침공에 이어 1213년 가을 다시 야호령을 넘어 거침없이 진격하던 몽골군은 전과 달리 거용관 북구에서 진격을 멈췄다. 거용관에 철제 관문을 달아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을 따라 샛길로 서쪽의 비호령을 넘은 뒤 자형관(紫荊關)을 통해 진입한 제베의 부대가 거용관 남구의 금군 본영을 기습함으로써 결국 거용관을 손에 넣긴 했지만 몽골군은 바로 중도로 진격하지 않았다. 화북과 요동 각지를 공격해 중도를 고립시킨 다음에 1214년 중도를 포위했다. 그 사이 정변으로 즉위한 선종은 항복 권고를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결국 굴복, 1214년 칭기즈칸에게 위소왕의 딸 기국공주(岐國公主)와 금백(金帛), 동남녀(童男女)5백명, 비단옷 3천벌, 말 3천필을 보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시링골 초원에 도착했을 때 선종은 몽골군의 위협이 덜한 황하 남쪽 남경(南京·변경·현재의 카이펑·開封)으로 천도했다. 이를 화약의 파기로 간주한 칭기즈칸은 가을에 다시 징벌군을 보냈고 1215년5월 결국 중도를 함락했다. 하지만 금조에 대한 뒷일은 국왕 무카리에게 맡기고 화약무기 진천뢰 등이 포함된 막대한 전리품만 가지고 몽골로 철수했다.
그런데 왜 5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공격한 금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군대를 돌린 것일까. 군마를 빼앗겨 기동력을 상실한 금군은 이제 종이 호랑이였고 서방의 정세 역시 갑자기 악화됐다. 또 몽골로 돌아간 칭기즈칸이 곧 서정(西征)에 나섰으므로 철군이유는 자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칭기즈칸은 농경민의 황제를 꿈꾼 적이 없었고, 초원의 유목민 튀르크족과 페르시아인의 카간이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는 점이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은 칭기즈칸 침입 이전에 서위구르, 카라키타이(西遼), 호레즘 등 세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투르크계 왕조 서위구르는 톈산산맥 동쪽의 동투르키스탄에, 카라키타이는 탈라스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 호레즘은 이란화된 투르크계 왕조로서 서투르키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카라키타이는 중국의 요나라가 1125년 멸망한 후 거란족의 지도층이 서진, 톈산북로를 통과하여 돌궐계 카라한조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에게 멸망당한 나이만족의 왕자 퀴츨뤽은 칭기즈칸에게 쫓기자 카라키타이에 접근, 군주 귀르한의 호의를 산 후 카라키타이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호레즘의 군주 술탄 무하마드와 결탁해 카라키타이를 멸망시켰다. 카라키타이의 서부는 호레즘이, 동부는 퀴츨뤽이 차지했다.
호레즘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이란 전역과 이라크 일부, 남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하였으며, 카라키타이를 멸망시킨 후 우르겐치와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실크로드의 중심부 등 방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해뜨는 곳의 군주이고, 술탄은 해지는 곳의 군주였다.
몽골과 호레즘은 친선을 다짐했지만 둘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술탄은 전형적인 이슬람왕조의 통치자이며 매우 야심찬 알라신의 사도였다. 그는 자신을 한 왕조의 통치자로서보다는 이슬람세계의 통치자요, 수호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술탄이 알라의 통치권을 전세계에 구축하라는 알라신의 법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칭기즈칸은 이기는 동물만이 살아남는 야생의 생태, 즉 초원의 법에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존 스미스가 지적한 것처럼 초원의 전사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었다.
1218년 칭기즈칸은 5백마리의 낙타에 동방의 온갖 진귀한 물품을 실은 커다란 캐러밴을 편성, 4백50명의 사절단을 호레즘왕에게 보냈다. 사절단이 호레즘의 첫번째 성 오트라르에 도착하였을 때 성주 이날측이 이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모두 죽이고 물건들을 빼앗아버렸다. 낙타몰이꾼 한 사람만이 탈출, 필사의 도주 끝에 몽골에 도착해 이 사실을 알렸다.
칭기즈칸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 격노하여 복수를 맹세했다. 그러나 당시 칭기즈칸은 즉각적으로 호레즘과의 전쟁을 개시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특별히 귀족으로 구성된 사신을 호레즘의 술탄에게 보내 이날측의 도발에 항의했으나 술탄은 오히려 사신 한명을 처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수염을 깎아 돌려보냈다. 수염이 권위의 상징인 무슬림 사이에서는 이것은 더할 나위없는 모욕이었다. 이슬람 학자 나사위는 『이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슬림의 피가 흘렀는가』하고 탄식하였다. 이 사건은 중앙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고 말았다. 칭기즈칸은 술탄의 행위에 대해 듣고 언덕에 올라 모자를 벗고 하늘을 향해 사흘 낮과 밤 동안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한다.
『이같은 고난을 일으킨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저에게 복수할 힘을 주십시오』 칭기즈칸에게 있어서 복수는 도덕적 의무였고, 하늘의 뜻이었다.
호레즘 정벌에 나선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1219년 이르티슈강에 도착하였다. 몽골군은 여기서 도하전투훈련을 벌였다.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 등 거대한 강으로 둘러싸인 호레즘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몽골군은 그해 가을 호레즘 변방도시 오트라르에 접근했다. 칭기즈칸이 즐겨쓰는 책략이 호레즘 공격에도 적용되었다. 첫째, 심리전을 사용한다. 공격에 앞서 자신이 신에 의해 선택된 통치자임을 천명하고 적국의 군중에게 저항하는 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방침을 공포하고 점령후에는 그대로 시행한다. 둘째, 적국에 대한 연구와 첩보를 강화하여 그 정보에 기초하여 적국의 내적 취약성을 폭로하고 교란작전을 펴서 적국 지도층 사이에 갈등과 반목을 조장한다. 셋째, 모든 종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장하여 종교적 핍박을 두려워하는 현지주민의 지지를 끌어낸다.
칭기즈칸은 자신이 평소 호의적으로 대해온 대상들을 이용해 호레즘의 지리적 특징, 군대배치도, 군인들의 사기, 주민동정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몽골의 군주가 하늘이 정한 온세계의 군주라는 말과 몽골군이 과거 전쟁에서 저항한 자를 어떻게 처형했는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게 해 호레즘 백성들의 대항의지를 꺾고 심리적으로 무력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칭기즈칸은 1220년 2월 오트라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전투는 6개월간 지속되었으나 오트라르는 결국 몽골군에 함락되어 이날측과 주민 모두가 학살되었고 도시는 그후 다시 재건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몽골군은 다음 공격목표인 부하라를 손쉽게 함락하고 풍요롭게 번창하던 실크로드의 진주 사마르칸트로 향했다. 사마르칸트 공격은 칭기즈칸에게 호의적인 이 도시의 대상들과 무슬림지도자들이 항거를 하지 않음으로써 쉽게 끝났다. 성에서 대항하던 투르크군 3만여명은 도시민 대표들이 투항한 다음날 항복했으나 모두 무참히 처형당했다.
칭기즈칸은 호레즘을 무너뜨리고 동서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심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고 결국 세계의 제국을 건설해 동서양의 군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청아한 하늘색 돔과 섬세한 모자이크 무늬가 아로새겨진 레기스탄 광장의 건물들, 비비하님 사원, 귀르에미르(티무르의 묘)….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최대의 도시였던 우즈베크의 사마르칸트. 「동방의 에덴」으로 불리던 이곳은 수많은 모스크(사원)와 미나렛(탑)들이 마치 동화 속의 나라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특히 7세기경 소그드 아흐르만왕의 궁전 벽화에는 유럽 중국 아랍, 심지어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아시아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사절단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사마르칸트의 과거 위상을 실감케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마르칸트에서 그 옛날의 영화를 되찾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칭기즈칸의 손자 훌레구는 1256년 본격적인 서방원정을 위해 이슬람세계의 수도 바그다드로 향하던 도중 오늘날의 이란 땅에서 「암살자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쳤다.
이슬람 시아파인 이스마일을 추종하던 암살자단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중동 제국의 요인을 암살하는 테러로 중동 전역을 근 2백년간 공포로 몰아넣던 집단. 1092년에는 셀주크조의 재상 니잠 알 물크가, 1191년에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건설한 라틴왕국의 콘라드국왕이 암살되었다.
「독수리 요새」로 불렸던 이 성채는 앞은 경사가 60도 가량 되는 가파른 바위산인데다 뒷면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정상에서는 사방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정상에는 성채를 쌓았던 벽돌 무더기들이 남아있고 바위틈에 대형 우물도 있어 오랫동안 포위되어도 견딜 수 있는 「천험의 요새」였음을 짐작케 했다.
1273년 페르시아지방을 지나간 마르코 폴로는 이곳에서 전해져 오던 암살자단과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산상(山上)의 노인」 하산 벤 사바에 관한 이야기를 동방견문록에 소개했다. 노인은 이 산 계곡에 포도주와 꿀과 우유가 흐르고 아리따운 여인들이 있는 궁전과 정원을 만들어놓고 젊은이들을 「하시시」라는 대마초를 먹여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것.
이곳에서 즐겁게 지낸 청년들은 적국의 요인을 암살하고 돌아오면 다시 「천상의 낙원」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노인의 꾐에 빠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명령을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훌레구는 암살자교단 내부의 갈등을 이용한 회유책으로 이 험한 성채도 함락, 철저히 파괴한다. 성채를 버리고 몽골군에 투항한 수령 루큰 웃딘은 몽골로 가던 길에 쿠빌라이칸의 지시에 의해 암살된다.
1979년 이슬람원리주의를 내건 호메이니의 혁명으로 시아파가 지배하는 이슬람공화국이 된 이란이 강경한 대외정책으로 중동에 긴장을 지속시키고 미국과 유럽 여러나라로부터 많은 테러의 배후로 지목받아온 것은 이러한 과거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칭기즈칸의 길]세계지배와 역사적 의미
몽골제국이 출현하기 전에도 유라시아의 초원을 무대로 등장했던 여러 유목국가들이 있었지만 중동이나 유럽을 직접 침략했던 예는 그리 흔치 않다. 과거 스키타이인들이 중동으로 들어가 아시리아제국을 무너뜨렸고, 아틸라의 훈족이 센강을 건너 로마―고트 연합군을 대파하고 이탈리아로 들어가 로마를 포위한 일이 있었지만 그들이 그곳에 국가를 건설하지는 않았었다.
몽골인들의 정복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제국의 건설자인 칭기즈칸이 북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을 무너뜨리고 이 지역들을 자기 제국의 일부로 삼아 직접 지배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유목민의 아들이었고 그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초원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그의 원정은 「정복」이 아니라 「응징」을 위해서 실행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사정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정복이 추진되었고, 그것은 칭기즈칸의 경우와는 달리 「정복」과 「지배」로 이어졌던 것이다.
몽골군의 러시아 원정은 1235년에 단행되었다. 원정군은 모두 12만명에 이르렀다. 칭기즈칸의 장손 바투가 총사령관이자 우익군을 맡고 오고데이칸의 장자 구육이 좌익군을 담당하여 1236년부터 볼가강을 건너 작전이 시작되었다. 1237년 킵착과 불가르를 경략하고, 그 다음 해에는 모스크바를 비롯한 도시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1240년 수도 키예프를 잿더미로 만든 몽골연합군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헝가리로 들어갔다.
1241년 4월9일 저 유명한 리그니츠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몽골군에 맞섰던 2만명의 폴란드―게르만 연합군은 괴멸되고 말았다. 그해 겨울 몽골군은 얼어붙은 다뉴브강을 건너 크로아티아로 들어갔다. 헝가리 국왕은 이미 도망친 지 오래였고 이교도 몽골군에 대한 「십자군」의 소집을 외치는 교황 그레고리9세의 호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야말로 유럽의 기독교세계는 몽골군의 말발굽을 저지할 아무런 힘도 없었다.
이때 몽골군은 갑자기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몽골 초원에서 오고데이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몽골 장군들에게는 유럽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보다 누가 다음 칸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그들의 운명에 더 중요했기 때문에 한가롭게 기독교도들과 전투하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투는 몽골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와 관계가 나쁜 구육이 칸에 즉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남러시아 초원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고 이것이 킵착한국이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이로부터 거의 3백년 동안 「타타르의 멍에」에 매여 살았고 그 상처는 지금도 러시아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중동 정복은 이보다 약 10년 뒤에 시작되었다. 쿠빌라이칸이 즉위한 뒤 자기 동생 훌레구를 보내 「암살자단」과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없애도록 한 것이다. 이슬람과 기독교 지도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암살자단도, 이미 실질적인 통치력을 상실한 칼리프의 바그다드도 몽골인들에게 그다지 힘든 상대가 아니었다. 훌레구의 군대는 1258년 1월29일 바그다드를 포위했고 2월10일 마지막 칼리프가 항복했다. 몽골인들은 칼리프를 교외의 벌판으로 끌고 가 카펫에 만 뒤 말발굽으로 짓밟아 죽였다.
칼리프는 아무리 유명무실했을지라도 기독교권의 교황과 같이 이슬람권의 단일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칼리프의 죽음과 칼리프체제의 소멸은 모슬렘들에게 커다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칼리프 대신 이교도 몽골인이 다스리는 일한국이 들어섰고 이로써 이슬람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몽골인들은 태평양에서 지중해, 시베리아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골인들이 파괴만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더러 최초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도시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서히 과거의 번영을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여러 지역과 문명이 하나의 정치체제 안에서 통합되면서 경제적 문화적 교류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동방에 대한 서구인들의 무지는 마르코 폴로의 글이 보여주듯이 보다 정확한 지식으로 대체되었고, 중앙아시아나 이탈리아 출신의 국제상인들은 초원과 사막과 바다를 누비면서 경제에 활력을 가져왔다. 이런 점에서 몽골제국이 인류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유라시아」라는 하나의 통합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김호동 (서울대 교수)
몽골 오논강 |
『해가 뜨는 곳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하늘이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정복하리라』
몽골군대가 이렇듯 세계를 제패하고 경영할 수 있었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왔는가. 몽골군대의 기마병은 10만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적은 수로 현대 미국도 하기 힘든 중국과 중동―유럽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윈윈(Win & Win)」전략을 수행한 것은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의 연구는 몽골의 군사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동에 편한 가벼운 그물갑옷, 도망가면서도 뒤로 화살을 쏘아대는 전술, 가족 가축과 함께 이동해 보급로가 따로 필요없는 전선 형성 등 독특한 전술운영을 했던 몽골군은 당시로서는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갖추었었다.
칭기즈칸 군대는 또 공포를 이용한 심리전과 정보전을 자주 활용하였다. 호레즘왕국의 변방 오트라르에서 몽골 상인들이 학살당했을 때 칭기즈칸은 『그들의 머리에 달려 있는 머리카락 숫자만큼 보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시도했던 사마르칸드 닛샤푸르 메르브 우르겐치 등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대학살이 벌어졌고 이러한 무시무시한 학살의 소문은 다른 전투에서 적의 군사들로 하여금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게 만들었다.
바그다드를 칠 때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기독교도를 이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술을 사용하는 등 직접 싸우지 않고 이기는 다양한 병법도 십분 활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력의 특성만으로는 몽골이 유라시아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근 1백50년간 경영한 사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몽골비사(秘史)는 칭기즈칸의 총신 야율초재(耶律楚材)도 「말(馬)로써 세상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드넓은 초원에서 정처없이 흩어져 살던 유목민들의 내부 힘을 한데 모아 폭발시켜 「팍스 몽골리카」(몽골 아래의 평화)를 이뤄낸 것은 칭기즈칸의 탁월한 지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칭기즈칸이 이전의 유수한 정복자와 달랐던 것은 모든 민족과 종교를 인정하는 개방적인 리더십을 갖춘 점이었다. 요즘 말로 「세계화」의 시각을 갖춘 리더십이었던 것.
둘째, 칭기즈칸의 「자유무역주의」정책은 파괴됐던 실크로드 도시를 다시 번성하게 했고 몽골제국에 엄청난 부의 축적을 가져왔다. 14세기 초의 원(元)제국과 베네치아공화국의 상인 보호에 대한 통상조약을 보면 「캐러밴(낙타대상)의 도난에 대해선 원이 변상한다. 세금은 일률적인 매상세 3.3%만 내고 관세는 물리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셋째, 칭기즈칸이 세운 「역참(驛站)제도」라는 독특한 통신망은 광대한 제국의 통치를 매우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역참제도는 대칸의 명령과 각종 정보가 빨리 전해질 수 있도록 40㎞마다 「참」이라는 역을 두고 숙박시설 식료 말을 구비해 놓은 것. 전령들은 릴레이식으로 하루에 5백㎞씩 주파, 카라코룸에서 유럽까지 보름이면 도착했다고 한다.
이 통신로는 20세기 초까지 가장 빠른 길이었고 그 후 유라시아 횡단철도가 건설되어 군사로 겸 통상로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데이가 죽은 후 후계자 자리를 두고 분쟁이 일어나면서 몽골제국은 차츰 몇개의 한국(汗國)으로 분열되어갔다. 특히 1259년 일한국의 카잔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자 종교를 두고 심각한 갈등이 빚어졌다. 일한국에서는 기독교도들이 몰살당했고 쿠빌라이칸은 이슬람신도들을 탄압, 중국에서 추방해 버렸다.
종교에 관용하라던 칭기즈칸의 충고를 듣지 않은 몽골인들은 분열했고 잇단 경제 정치적인 갈등으로 결국은 제국의 몰락을 가져오고 말았다. 또 전쟁을 통해 건설된 몽골제국은 정복이 끝나고 전리품의 유입이 중지되자 정복된 정주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고 말았다.
몽골은 1921년 소련의 도움으로 세계에서 두번째의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2백50여년간 몽골인에게 지배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인들은 칭기즈칸을 입에도 올리지 못하게 하는 등 민족주의를 철저히 탄압, 영웅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러나 구소련 붕괴 후 자주성을 되찾은 몽골은「칭기즈칸의 부활」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세우는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칭기즈칸의 신화」가 강요된 오랜 침묵을 깨고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다시 「모든 것을 세울」 수 있게 될까.
〈전승훈기자〉
『칭기즈칸의 정복로를 따라 한국인이 몰려온다』
유라시아대륙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기회의 땅」 중 하나. 7백여년전 칭기즈칸이 바람처럼 휘몰아쳤던 이 대륙에 21세기에는 한국인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땅에 대우 LG 삼성 현대 등 한국 대기업들의 간판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자동차 전자 건설 통신에서부터 구리광산 채굴 등 자원개발,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까지 한국 기업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드물다.
우즈베크 안디잔주에 자리잡고 있는 우즈―대우 자동차공장. 이곳 아사카시(市)는 두집중 한집 꼴로 대우직원들이 살고 있다. 공장에는 3천2백명의 우즈베크인 근로자들이 한국인 직원들의 통솔하에 티코 다마스 씨에로 등을 연간 20만대 생산하고 있다.
카자흐의 대우알렘, 이란의 케르만 자동차공장, 폴란드의 대우―FSO 등 전자 통신 자동차 등을 앞세운 한국 기업들의 서진(西進)을 보며 서구인들은 크게 경계하고 있다. 특유의 친화력과 추진력으로 현지인들과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극복해가며 무서운 속도로 진출해오는 한국인들의 모습에서 칭기즈칸의 기억을 떠올리기 때문일까.
유라시아대륙에는 또 60년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40여만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고 소규모 무역업을 하는 「개미군단」 사업가들도 광범위하게 진출해 있다.
카자흐의 수도 알마티에서 만난 사업가 손동진씨는 『북한이 철도를 개방하여 유라시아대륙을 연결하는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할 수 있게만 된다면 이 대륙은 우리의 무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승훈기자〉
작열하는 태양. 숨쉬기조차 힘들다. 도로에 온도계를 대봤더니 섭씨 72도를 웃돌고 나무 그늘에서도 40도가 넘는다. 자동차 타이어가 부풀어 올라 금세라도 터질 것 같고 이글거리는 복사열 속에 낙타들이 물위를 걷는 듯이 보인다.
1백17일만에 횡단한 유라시아 대륙 1만7천여㎞. 초원과 사막, 거대한 내해(內海)를 건너는 대장정은 기마민족의 끊임없는 생존투쟁의 역사만큼이나 장쾌하고 드라마틱했다.
첫 구간인 몽골의 대초원에서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흙먼지만 날리는 초원에서는 마치 바다에 던져진 것처럼 방향감각조차 없다. 고비사막과 알타이산맥을 넘을 땐 주유소는 물론 물조차 찾을 수 없어 대형트럭에 물과 휘발유를 가득 싣고 다녀야만 했다.
돌멩이와 모래구덩이를 피해가느라 시속 15∼20㎞로 거북운행을 하다보니 말이나 낙타를 타고 가는 현지인들이 차라리 우리보다 빨랐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운 나라」 몽골은 나그네를 대하는 소박한 인정이 흘러넘치는 곳. 밤 10시경 초원의 지평선 아래로 해가 져 야영을 하기 위해 텐트를 치면 어디서 왔는지 말을 탄 유목민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잉바인 오(안녕하세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한 뒤 집안에 있던 카펫까지 끌어내 텐트 바닥에 깔아줬다.
그리고 자신의 집인 게르(몽골 전통의 천막식 가옥)로 초대, 양 한마리를 통째로 잡거나 소젖 말젖 낙타젖 등을 발효시켜 만든 갖가지 차강이데(유제품)와 양고기를 넣은 만두 「보오츠」 등으로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
사막 실크로드의 주요 길목에서 영욕의 세월을 겪어온 사마르칸트 부하라와 톈산산맥 이시쿨호수 등을 지나 「이슬람 원리주의」의 나라 이란 국경에 도착하자 험난한 자연의 장애 못지않은 또다른 장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란 종교경찰은 국법상 통과할 수 없는 음란서적, 비디오테이프가 없는지 살피느라 탐사팀의 모든 짐을 샅샅이 뒤지고 노트북 컴퓨터부터 촬영용 빈 테이프의 내용까지 일일이 조사했다.
그들이 이틀 동안 탐사대의 짐을 뒤지던 모습은 차라리 야단이었다.
탐사대의 유일한 여성대원인 김지인씨(28·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대학원)는 『귀와 엉덩이를 보이지 말라』는 종교경찰의 지적을 받고 이란구간 내내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검은 망토와 머리수건인 헤잡, 차도르를 쓰고 다녀야 했다.
분쟁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카프카스산맥 이남의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에서는 전쟁과 마피아의 위험이 곳곳에서 취재팀을 가로막았다. 그 장애들을 하나 하나 넘기며 전진하다 내전지역인 그루지야 북쪽 압하스 국경을 넘기 직전, 결국 그루지야군의 총부리와 탱크에 저지당했다. 『당신들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니 돌아가라』
탐사대는 할 수 없이 흑해 동안을 따라 북상하려던 계획을 변경, 남쪽 해안도로를 따라 예정에 없는 터키로 들어간 후 배로 흑해를 건너 우크라이나로 들어가야만 했다. 탐사대원과 차량 2대를 실은 전장 1백42m, 1만1천t의 아제르바이잔 국적의 메르쿠리Ⅱ호는 꼬박 30시간만에 흑해를 건넜다.
탐사대가 「칭기즈칸 제국」의 발자취를 따라 자동차로 횡단한 나라는 몽골 러시아 카자흐 키르기스 우즈베크 투르크멘 이란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터키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총 12개국.
국경을 통과할 때마다 수비대의 검문과 철조망에 막혀 1주일을 기다리기도 하고 수천㎞를 돌아가기도 했다.
드넓은 유라시아대륙에 민족도 종교도 국경도 비자도 여권도 필요없는 「하나의 세계」를 건설했던 칭기즈칸의 위대함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전승훈기자〉